똥구멍으로 시를 읽다---------------------------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 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의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시- 고영민 시집「악어」에서

윤덕점

2005.10.21 00:07:56
*.246.244.144

옥선생님! 이렇게 현장감이 넘치는 시를 찾아내는 시각이 돋보입니다. 역시 문창과의 장학생 답습니다.

옥순룡

2005.10.21 08:42:49
*.104.250.34

윤시인님 !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글쓰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쯤 나의 한권의 시집이 나올지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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