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하이.~~ 제8편

조회 수 6617 추천 수 0 2006.01.17 11:44:36


섭섭하이.~~ 제8편(“섭섭하이.는 캄보디아 어로 안녕하십니까? )
# 제3일/ 11월 26일

캄보디아에서 땅을 사려면 명의를 빌려주는 법인체를 통해서 매입하여야 한다. 그러나 땅의 임대 방법도 있다. 임대 최장 기간은 90년이다. 다시 한번 갱신하면 180년이므로 장기적으로 임대하면 사는 것과 같다.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앙코르와트 사원으로 살인미소가 운전하는 아세아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입구에 도착하였다. 하늘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었고 따가운 햇볕이 내리 쬐는 앙코르와트 유적은 푸른 하늘에 반영된 해자와 어울려 한 폭의 캘린더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앙코르는 죽음의 도시라고 원주민들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며.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살아서 나가지 못해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원은  한때 동남아를 지배했던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소야바르만(Suryavarman) 2세 (1112∼1152)에 의해 12세기 전반에 약 30년에 걸쳐 건축되어 브라만교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合一)하기 위해 건립한 거대한 힌두교 사원이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그들은 신과 같아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왕들은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다.
앙코르 와트의 구조는 힌두교의 우주관에 입각한 우주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앙의 높은 탑은 우주 중심의 메루(Meru)산의 정상이며 주위의 5개의 탑은 주변의 봉우리들을 상징한다.
외벽은 세상 끝에 둘러쳐진 산을 의미하며 해자는 ‘바다’를 의미한다. 이 해자의 폭은 약260m, 길이는 약 5.5㎞에 달한다.
  이 해자를 건너기 위해서는 나가(Naga)난간을 따라 이어지는 250m의 사암다리를 건너야 한다.  해자 바깥은 사람이 살고 해자 안은 신이 산다고 했다. 그리고 해자는 전쟁 때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인공으로 판 호수이다.
날씨가 엄청 무덥다. 카메라 가방을 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땀을 더 흘렸다. 땀 흘리는 것이 보기가 딱했던지 경순 형수님이 물병을 넣는 조그마한 가방을 선물로 주어서 그기에 물을 담아 먹으니 편리했다.
물을 갈아먹은 탓인지 아니면 어제 저녁 압사라 춤 공연 때와 오늘 점심때 아내가 갖다 준 팥빙수와 아이스크림이 문제인지 배가 틀리듯 아프고 속이 엄청 거북하여 좋지 않다.
사원 입구에 있는 나가를 카메라 구도에 넣어 앙코르와트 사원의 모습이 해자에 반영되는 풍경을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과 함께 앵글을 맞추어 놓고 보니 한 폭의 그림이다. 입구에서부터 펜탁스645n  카메라로 풍경을 몇 커트 촬영하였다.
속은 좋지 않고 땀은 흐르고 경치는 좋고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사원으로 가이드와 함께 들어가 버리고 바빠서 죽을 맛이다.
입구에 들어섰다.
사원의 동쪽은 창조, 서쪽은 죽음, 남쪽은 자연, 북쪽은 희망을 뜻하며 히말라야가 북쪽에 있다고 한다.
고대 인도의 또 다른 서사시 <라마야나>의 이야기도 조각되어 있다. 라마신은 시타 공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아 악마의 왕 라바나가 시타공주를 납치한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라마는 싸움을 하기로 하고, 원숭이의 대군을 인솔한 하누만과 합세하여 성스러운 뱀, 등 부하를 데리고, 비슈누나 시바를 비롯한 많은 신들 역시 전차나 말을 타고 라마를 응원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라마의 군대는 바다를 건너 악마의 군대와 싸움을 한다.
처음엔 불을 뿜자 성스러운 새들은 갠지스의 큰 강에서 물을 옮겨 악마의 불을 꺼 버린다.
콘도르에 탄 라마는 원숭이 왕을 거느리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악마 왕 라바나를 쓰러
드리고 시타 공주를 구출한다. 구출 후 신들은 공주를 의심하여 악마를 쫓아간 것이 아니냐고 하자 시타 공주는 활활 타오르는 불 속으로 손을 밀어 결백을 보이고 그 후 라마와 시타공주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수리야 바리만 2세의 생활상, 야마(염라대왕)의 지하세계 등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그 유명한 압사라 춤을 추는 여인들의 모습, 벽 하나, 지붕 하나에도 조각들이 이야기가 새겨져 있는 앙코르의 유적은 그 짧은 세월동안 어떻게 작품들이 완성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돌이 없는 이 지역에서의 돌로 된 건축물이 완성되어 있다는 것, 엄청난 조각의 산물, 영화를 누리다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  등이 신비스러운 곳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앙코르 와트  주 회랑은 일층의 경우 신전 주변을 한 바퀴 둘러싼다. 너비 2.5미터, 외부의 빛을 거의 차단하지  않는 32개의 세련된 기둥들이 받침 장치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그 북쪽 및 남쪽 벽은 길이가 각 가각 202.14미터다. 동쪽 및 서쪽 벽은   각 가각 187미터, 이 벽들은 2미터 높이의 얕은 돌을 새긴 판벽 8개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중 네 개는  길이가 49미터이고, 나머지 네 개는 거의 100 미터다.
그렇게 1200제곱미터에 달하는 조각 작품이 펼쳐진다. 회랑 동쪽 측면 남쪽 익벽에는 49미터 길이 판벽에,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나가 뱀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인도 신화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유해교란 (乳海攪亂) 이다.  
37년간 2500명이 투입되어 지어진 건축물로서 세계7대 불가사의다운 조각 벽화 캄보디아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여 조각한 벽화가 너무 엄청나다.
무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에  가이드 설명을 기록하고 촬영하는 일인이역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바쁜 나머지 정확한 기록을 제대로 못하여 벽화의 역사기록의 조각 벽화의 내용을 가이드의 설명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인도의시인 타고르는 “마바르타 안에 세상이 있고 마바르타 안에 없는 것은 없다. ” 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야바르만(Suryavarman) 2세 (1112∼1152)는 외삼촌이 왕이었는데 전쟁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아 앙코르를 건립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부조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가이드가 가리킨 부조를 자세히 보니 벽화 중 구멍이 뚫린 곳이 있었다. 그 이유를 가이드가 말한다. 그곳에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어느(?) 누가 보석을 빼 간 자리라고 한다.
  긴 회랑을 돌아서 중앙에 있는 탑으로 향했다. 중앙 탑 오르는 계단은 경사가 너무 급하다.
그 돌계단도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모서리가 닳아 계단의 모양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몸이 무거운 나도 힘들지만 고소 공포증이 있는 이 변호사는 거의 얼굴이 죽을상이다.
나중에 다 내려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간신히 내려왔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내가  급경사에 내려올 때도 굵은 철구조물로  만들어 놓은 난간에 의지하고 내려왔는데 그 굵은 철사가 사람들 손에 얼마나 닳았는지  반들반들해 햇빛을 받으니 반사되어 빛이 나고 있었다. 이층에는 사각형의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스님들이 수도하던 공간이라서 조각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느낌이다.
가장 중앙에 있는 탑에도  엄청나게 큰 불상이 조각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조각 문화에 도취되어 이리저리 사각 공간을 발 빠르게 둘러보고 불상 탑을 피사체로 촬영을 몇 커트 하고나니  일행들은 벌써 일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내와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삼수 형이 빼앗듯이 들고는 가파른 계단을  난간도 잡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간다. 일행들과 관광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삼수 형에게 쏠렸다. 그러나 삼수 형은 무서워하지 않고 아주 쉽게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그러자 이를 보던 외국 관광객들이 박수를 쳤다.
다시 해자를 건너 앙코르와트 사원을 배경으로 하여 단체 촬영을 하고 부부들끼리의 기념 촬영도 마쳤다. 다시 살인미소의 아세아 미니버스는 상황버섯 판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땀도 흐르고 배도 아프고 갈증도 나고 해서 판매장에서 주는 상황버섯 다린 차를 마시고나니 갈증이 좀 가셨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마시는 음료 계통의 물이 석회질 성분이 많아서 체내 적응이 되지 않는가보다.
이번 여행에 국내에서 생수를 못 사온 것이 후회되었다. 필리핀 여행 때도 준비해간 생수로 건강이 이상이 생기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 준비를 너무 안이하게 대처한 것 같다.
캄보디아에서의 상황버섯은 1kg 당 240,000원이다.
2kg을 구입하면 1kg을 덤으로  준다고 한다.
이곳에서 몇 분이 고향에서 환자분이 사달라고 신신 당부하면서 부탁한 것과 그리고  한 두분이 구입한 걸로 기억한다,  
판매장에서 판촉 방송을 하는 한국 사장의 멘트가 충동구매를 일으키도록 하는 부분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멘트를 해서 거부감이 일어 일행보다 먼저 슬며시 판매장을 빠져나오는데  ‘ 또 사장 왈 “ 상황버섯 긴급 뉴스 ” 사고 싶은 버섯을 직접 본인이 마음대로 골라서 드리는 긴급 뉴스입니다. “  라고 판매 유혹을 했다.
피로하고 무덥고 배도 아프고 몸살기운도 나고 해서 컨디션이 엉망이다. 멘트도 무시하고 차에 제일 먼저 올랐다.
가이드 이승호 대리는 씨엠립에 있는 “평양랭면“ 아가씨와 자주 만난다고 한다. 이대리는 키가 훤출하게 크고 성격도 좋아서 식당가는 곳마다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엄청 좋았다.
지금 “평양랭면”에 파견되어있는 아가씨가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가 좋아서 이따금씩 만나고 있다고 한다.
이데올르기는 틀리지만 청춘남여의 사랑에는 국경도 초월한다고 했는데 이데올르기가 무슨 문제가 될 수 있으랴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재미로 만나서는 될 일이 아니다, 라고 충고했다.
캄보디아에서의 킬링필드는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라서 재삼 거론할 것이 못되지만 그래도 캄보디아를 방문하면 킬링필드의 현지를 둘러보아야 하는데 그곳으로 여행 프로그램이 잡혀 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킬링필드의 내용을 여기서 잠깐 고찰 해보기로 하자. 필자도 정확한 공부를 하지 않아서 킬링필드의 내용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간추려 보았다.

『1975-1979년 1월 사이에 캄보디아의 공산혁명은 1백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와 30여만 명의 난민을 만들어낸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비극과 공포의 세월이었다.  공산 혁명의 시대는 캄보디아의 역사와 전통을 크게 변화 시켰다.
바로 '민주 캄푸치아 (Democratic Kampuchea)'로 외부세계에 알려진 크메르 공산혁명 정권이 3년 7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의 기간에 이루어진 사건으로서  공산혁명정권의 학정과 살해로 점철된 악행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전쟁과 크메르루즈의 학정을 피해 몰려들었던 프놈펜의 인구는 약 2백만 명 이상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전쟁의 공포와 식량부족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이들은 혁명 사업의 일환으로 각 지방 농경지대에서 노역하기 위해 강제 이동되었다. 마침4월의 건기라 마실 수 있는 물과 식량 부족 굶주림과 허기, 말라리아로 길거리에서 참담하게 죽었다.
또한 논놀 정부에서 공직 생활을 했거나 군부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프놈펜에서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오직 혁명지도부의 가족과 몇 백여 명의 공장 노동자들만 프놈펜에 남을 수 있었다. 강제 이동에 반항하는 자들은 닥치는 대로 처형되었고 전국적으로 2-3백만 명의 인구가 농부로 신분이 바뀌어 시골지역으로 이동되었다.  심지어 병원의 병상에 있는 환자는 물론, 어린이, 노약자들도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추방 길에 버려지거나 학살되었다.
이 학정에 참여한 크메르 루즈 공산군들의 대부분은 15세 이하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이들출신은 시아누크 치세와 논놀 정권 시대의 가난한 하층민들로 아무런 특권도 없는 피착취 계급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 CPK에 가입하여 공산당으로부터 무산 계급의 혁명을 교육 받으며 착취 계급에 대한 증오심을 학습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정말로 가축이나 가재도구는 물론 땅 한 뙈기도 없는,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모택동 어록을 빌린다면 이들은 혁명이 잘 새겨질 수 있는 '가난하고 멍청한 애들'이었다.
1975년 이들의 숫자는 만오천 명이나 되었으며 공산당의 충직한 하부 조직원으로 활약했다. 한편 공산지도부는 이들과 더불어 행동대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13-15세 사이의 청소년들을 점령지역에서 징용하여 간단한 정치사상 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켜 전투에 투입시키고 공산혁명의 첨병대원으로 육성하였다.
이들은 가족의 의무, 사회전통의 관습, 종교적 의식에서 벗어나 오직 절대적인 혁명조직에 충성할 것을 교육받음으로써 혁명의 칼날이 되었다. 무산자 계급, 공산당 하부조직원들의    가난한 과거의 기억과 새로 획득한 공산당의 권력과 그리고 전통사회를 부정하고 혁명조직에 충성할 것을 교육받은 반항적 기질의 청소년들의 대담성은 혁명의 과제를 절대적으로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크메르 루즈의 숙청 작업은 1975년 10월9일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당 지도부 위원들이 혁명지도부의 기초 내각의 부서에 배치되었는데 경제 및 국방에 서기장 폴 포트, 당  조직업무와 교육에 부서기장 누온치아, 외무에 당 서열3위인 이앙사리, 국민통합전선과의 연락업무 및 재정에 키우삼판, 통상업무에 코이투온 등 남성11명과 여성2명이 23개부서의 책임을 맡았다.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고 폴포트가 수상에 오르면서 집단 지도체제는 붕괴되고 엄청난 희생을 불러일으킨 숙청작업이 이어졌다.
숙청의 발단은 1976년9월에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의 캄보디아 공산당 창설 기념일에 대한 이견에서 시작 되었다.
  이때 두 명의 고위 당간부 케오 미아스 (Keo Meas)와 논 수온 (Non Suon)이 당 지도부를 배반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심문 센타 툴 슬랭 (Tuol Sleng)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 심문 센타는 프놈펜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만행의 전시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캄보디아 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센타는 직원이 1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타자수, 사서, 사진사, 전기기사, 대필사, 전직교사, 심문관등으로 구성되어 혁명지도부의 충직한 집행자로 활약하였다.
폴포트는 두 명의 고위 당 간부를 숙청한 이후부터 미 세균이 침투하여 당이 병들었다면서 악덕 세균 색출을 지시하였다. 악덕 세균으로 간주되는 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 당내 반혁명 분자, 전직교사, 지식인, 의사, 약사, 논놀 정권의 관리와 군인들, 중산층등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맹이 주도할 때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당원들, 외국과 관련을 맺었던 사람들, 베트남 국경지대인 동부지역에 연관된 관리나 그 지역 사령관이나 군인들이 포함되었다.
일단 의심을 받아 심문 센타에 끌려가면 자술서에 3명의 다른 사람들을 거명해야 했다. 이 거명된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다. 이 심문 센타에 끌려온 사람들은 거의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혁명기간에 약2만 명이 이 심문 센타에 끌려와 심문과 고문을 거쳐 처형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들어가지만 나오지는 못하는 곳'으로 알려 졌다. 이곳에 끌려간 약16,000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약10여 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끌려온 자들은 억지로 진술서를 작성하였는데 현재 4천여 장이 남겨져 보관되고 있다.
공산당에 대하여 가지적이고 잠재적인 모든 가능한 적을 처형하고 혁명정권의 권력을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대상도 가리지 않으로써 숙청의 희생자는 불어났다. 미처 출국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미국CIA 정보 요원이나 공산베트남의 정탐요원으로 간주되어 심문 센타로 보내져 결국 처형되었다.
이 숙청작업은 1930년대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행한 숙청작업과 2차대전 이후 동구 유럽공산국가에서 이루어진 고위 당 간부의 전례를 훨씬 뛰어넘는 크메르 루즈 공산당의 악랄성과 잔혹성을 말해주는 고유 대명사가 되고 있다.』

폴포트의 출신과 성장배경은 생략하기로 한다.

사실상 앙코르와트 관광은 끝나고 식사 후 공항으로 이동하여 하노이로 갈 예정으로 씨엠립의 “VIP 한국관” 레스토랑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한국식의 된장찌개 두부찌게 가 나왔으나 나는 식욕이 없어 슝늉만 먹고 식사를 종료했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서빙 아가씨들은 4명이었는데 주방 아주머니와 사장은 한국 아주머니였고 서빙 하는 아가씨만 현지 캄보디아 아가씨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중 나이가 어려 보이는 아가씨가 이승호 대리 만보면 미소를 지어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눈에 띄게 보였다.
  우리 일행은 이승호 대리를 보고는
“미남이니 아가씨들이 유혹을 노골적으로 하네 조심혀 “
하고 웃기도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아가씨 두 명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무슨 노래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 다 진지하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래서 삼수 형과 이형철회장이  팁을 1달러씩주고 격려하였다. 곧 공항으로 이동하여 하노이로 출국할 채비를 하였다.
캄보디아 공항의 면세점은 상품도 볼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상품 제조가 조악하여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상품도 기념이 될 수 있도록 디스플레이용으로 작게 만들어야하는데 너무 크게 만들고 비싸서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외 나들이를 가면 그 나라의 대표적 관광지의 기념품을 하나씩 구입해서 집에 디스플레이용으로 비치하는데 캄보디아에서 의 기념품은 포기했다. 그 대신 앙코로와트의 풍경이 담긴 VCD를 하나 구입했는데 컴퓨터로 돌려보니 화질이 엉망이었다. 그 VCD 값도 약 8000원정도하였다.
캄보디아에서는 되도록이면 꼭 사야 될 상품이 아니면 구입하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면세점 여직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친절은 하였다.
일행 중 이 변호사 부인이 상품을 고르느라 잘못하여 진열된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상품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책을 전부다 사라고 면세품점 여직원이 윽박질렀다.
조그마한 아가씨가 얼굴도 이쁘게 생기지도 않았지만 하는 짓이 미움 살 짓만 골라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경순 형수가 영어를 잘해서 통역을 했는데 물건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사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별로 소용도 되지 않는 책을 변호사 부인은 사야만했다. 모두들 캄보디아 면세점 아가씨를 못됐다고 하면서 ...
공산 국가이니 별수 없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책값 몇 푼이 문제가 아니고 잡혀가서 출국도 못하는 곤혹을 치루면 큰일 나니 조용히 출국하는 수밖에 ...
곧 공항 셔틀 버스를 타고 항공기 쪽으로 서틀 버스로 이동하였는데 승객들은 탑승을 하는데 셔틀 버스에서 내려 기내 트랩에 오르기 전 승무원이 다시 티켓 검사를 하였다.
그런데  방여사가 얼굴이 하얗게 되어 여권이 없어졌다고 한다.  남편인 박소장은 어쩔줄 몰라  방방 뛰고 난리다. 우리를 태웠던 서틀 버스는 저만치 돌아가고 있다.
난 캄보디아 승무원에게 나의 여권을 들어 보이면서 서틀 버스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come back ! bus " 하며 서투른 영어와 바디 랭귀지를 하였다.
그제야 승무원은 그 뜻을 알아듣고는 워키토키로 연락을 하니 가던 버스가 되돌아왔다. 버스 문이 열리자 방 여사는 재빠르게 버스에 올라 자리에 두고 온 여권을  찾아서 비행기에 탑승을 완료했다.
항상 사고는 예측 불허여서 사고 상황 그때에 적절히 대처 하지 않으면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배가 계속아파서  비행기 이륙 전에 정로환을 먹었는데 그것이 괌 싸이판 갔다 올 때의 감기약 먹고 탑승해서 초죽음까지 간일이 있는 증세처럼 비슷한 증세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기내식도 먹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좀전에 먹은 저녁까지 화장실에서 토해내는 2시간정도의 비행을 고통 속에서 시간 죽이기를 하여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내리니 하노이 현지가이드의 말이 “ 마치 전쟁터에서 철수한 군인들 같은 모습이다. ” 라는 멘트를 들었다. / 신짜오~ 9편(하노이-하롱베이)에서 계속
* 거제포토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1-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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