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짜오~~~ 제9편 (하노이)

조회 수 6481 추천 수 0 2006.02.14 11:16:48










신짜오~~~ 제9편 (하노이)
# 제4일/ 11월 27일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서 하노이를 들어오는 길은 두 시간 정도 소요되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다.
대우에서 직영하는 하노이 대우 호텔은 크고 넓고 시설이 국내의 고급호텔 수준으로서 사용하기가 편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니 앞에 투숙했던 사람들이 피우고간 담배 진 냄새 때문에 코를 들 수가 없었다.
몸도 좋지 않은데 더구나 담뱃진 냄새가 방에  배여 하루 밤을 보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몸살 기운도 나고 배도 아프고 하여 정로환과 게보린 두 알을 먹고 겨우 잠을 청하여 잤으나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새벽을 맞이해 아침에 기운이 없어서 겨우 기상을 했다.
조식을  죽으로 때우고 대기된 버스로 호치민 의 묘가 있는 바딘광장으로 향했다.
가이드 이름은 이신준이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키가 작고 덩치도 외소 하다.
도로 중앙에는 가로수가 심겨져 있고 활엽수도 심겨져 조경이 잘되어 있는 모습이다. 도시의 전체적인 느낌은 사이공과 다르게 정리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곳이 베트남의 행정수도라서 그런 느낌이 더 든다.
이제 베트남에도 “ 씨에스트” 라고 낮잠 자는 시간도 점차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 기업 한일펌프, 삼성, LG , 현대 등 많은 국내 기업들도  진출해 있는데 삼성 핸드폰이 베트남에서 제일 인기가 좋다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이제 공업화의 시작으로 물가가 비싸고 특히 공산품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공장의 대량 생산 설비 투자비가 내려가면 공산품 가격도 내려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80년대 초창기의 모습을 보는 것 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은 산유국이라서 기름값이 싼 대신에 물 값이 오히려 비싸다. 호텔에 라비앙 생수 한 병이 한국 돈으로 3000원하니 물 값이 엄청 비싼 셈이다.
베트남 국민들은 물을 전부 사먹는다고 한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석회질 성분이 많아서 자연수를 먹을 수 없다고 하니 산 좋고 물 좋은 우리 한국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마티즈 차도 베트남에서는 우리나라 돈으로 1500만원 정도 한다고 하니 내수 금액 약 800만원 정도 로  구입이 가능한 우리나라 가 얼마나 좋은지 !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비교해보면 우리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을 것이라고 국민 모두가 느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은 외국에 나가  그곳 사정과 형편을 실제로 눈으로 보고 체험하여 본 결과 우리나라만큼 환경과 경제적인 여건이 살기 좋은 아름다운 산하를 가진 자랑스러운 조국이라고 생각한다.
호치민 궁이 보이는 바딘광장에 도착하여보니 우리 일행보다 먼저 관광 온 한국 사람들로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바딘광장은 베트남의 일대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며 이미지가 중국 천안문 광장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러시아에 가보지 않았지만 아마 스탈린 광장을 본 따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이미지가 서로 비슷한 느낌이다.  이곳에서 국가의 주요행사가 있으면 행사장소로 사용한다고 한다.
  도로 중앙을 가로 질러 좌측에는 HO CHI MINH 묘가 콘크리트 건물로 되어 있고 우측 잔디밭 건너편에는 베트남 국회와 공산당 본부 건물이 보인다.
좌측 광고판에 붉은 고딕체로 베트남 글씨로 쓰인 글이 있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좌측에는 “베트남사회주의” 우측 광고판에는 “호치민은 우리가슴에 영원히” 라는 문장으로 붉은 글씨로 써져 있다.
호치민 묘소(Ho Chi Minh's Mausoleum)는 호치민이 사망(1969년)후 1975.9.2에 완공된 석재묘소로 건물 내부에 호치민 주석의 시신이 유리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
호치민은 생전에 화장을 원했으나 레닌, 스탈린의 장례 방법대로 호치민 시신을 러시아로 옮겨 부패방지 처리를 하였고 베트남 국민의 단결을 표상하기 위해 현재 묘소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호치민 주석은 베트남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고 한다.
호치민이 죽은 후 킹스아일랜드에 호치민의 시신을 모셔 놓았으나 실질적으로 베트남전이 끝나고 2년 동안 베트남 공산정부의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72년에 묘소를 완공하여 시신을 모셨다고 한다.
호위병이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며  매일(월·금요일 제외) 08:00∼11:00 일반에 공개되고  매년 9∼11월 초순  연례 보수기간에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일행의 단체 사진 촬영을 하였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니콘FM 카메라를 든 베트남 아가씨가 말도하지 않고 우리 일행의 단체사진을 찍는다. 가이드의 말이 이곳 광장 전속 사진사라고 한다.
연이어 내가 디지털 카메라로 일행의 단체 촬영을 중복되게 촬영 하였다.
시멘트로 포장된 중앙 도로 끝 부분에서는 호치민 궁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위치적으로 보면 호치민 묘소 뒤편 500m 정도 되어 보인다.
이곳에는 호치민 생존 당시 살던 생가 그리고 사무실용 목조건물, 호치민 박물관이 있었으며 전면의 바딘(Ba Dinh) 광장을 중심으로 주석궁(President Palace), 공산당사, 국회, 외무부, 외국 공관 등 핵심기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월남전이 치열할 때도 이곳은 미군의 폭격이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베드남의 정치적 심장부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주석궁 건물은 호치민이 서거할 당시까지 기거 하였다. 이 건물은 주요 국빈 방문 때 개방을 하며 베트남 공산당 서열 1, 2, 3 위 는 현재 어디에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주석궁 주변에는 “ 연리지” 나무가 길을 중앙에 두고 가지가 서로 합해져 있다. 호치민 주석은 합해진 연리지 나무를 보고 통일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호치민은 베트남 통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노이는 1954년 북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도였다가 1967년 베트남이 공산 통일된 후 현재 베트남 사회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후는 호치민시가 1월 중순에도 낮 기온이 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를 보이는데 비해 하노이의 겨울은 춥다.
경제수준은 더욱 차이가 나서 각종 외국기업들의 선전판이 거리를 가득 메운 화려한 호치민시(사이공시)와는 달리 하노이는 어두운 회색도시 같은 느낌의 행정 시 다운 모습이다.
호치민이 외세침략에 대항하는 8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 같은 성격을 갖췄다. 바딘 광장에서 호치민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베껴서 독립선언을 하였는데 이것이  호치민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이라고 한다.
호치민은 평소에 어린아이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동상에도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조경이 잘되어 있고 넓은 호수가 만들어져 있는 주석궁 그리고 호치민이 기거했던 건물을 관람하고 아들을 잘 낳게 기원하는 한 기둥 사원을 부인들 일행이 관람하고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문학사원(문묘(文廟) Van Mieu )에 이동하였다.   
     
문묘는 우리나라 성균관대학처럼 11세기에 세워진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다. 1976년 유교 인재를 등용하고자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공자를 모신 사당이 맨 안쪽에 있으며 왕이 1년에 2번 이곳에 와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입구에는 문묘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서있었는데 월남전 때 폭파 된 것을 새로 복구 하였다고 한다.
덕성문(德盛門) 입구를 들어서면 중앙 통로가 있다. 중앙 통로는 왕이 입장할 때 사용 하고  좌측 통로는 문과 , 오른쪽은 무사 가 입장한다고 한다.
좌, 우측 도로 옆에는 우물이 하나씩 있는데 신하들이 입장할 때 우물에 자기의 몸을 비춰 더러운 마음을 씻어 왕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유래를 지닌 우물도 있다.
이곳을 들어서니 바딘광장에서 우리 일행 단체 사진을 촬영한 아가씨가 사진을 인화해서 가지고 왔다.
사진 규격은 8x10 이다. 사진에 코팅까지 했다. 가이드가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라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있나 !  나는 총무가 공금에서 일괄 대금 지급을 하고 인수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모든 환경이 열악한 베트남에서 한 장의 인화지도 매우 비싸서 장난이 아닌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면 나머지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가씨는 뜻밖에 모두 사진을 사자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한다. 그 모습이 너무 순수하다.
우리한국 같으면 사진사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문은 재달문(才達門)이다 이곳 역시 덕성 문을 통과할 때처럼 같은 구조로 조경되어 있었다.  
   그 다음에 있는 규문각은 하노이 상징물로서  19세기 원조(沅朝)시대에 만들어진 규문각에는 8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들 비석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한 거북위에 세워져 있다.
1400년부터 1700년 까지 3년 그 후 6년 에 걸쳐 시행한 시험으로 당시에 지방 향시를 본 사람은 정시를 보게 되는데 모두 상대 평가였다고 한다. 1127명이 과거 시험에 합격했는데  전쟁으로 소실되고 82개만 남아있다.
그리고 33개 진사에 합격한 사람을 기리기 위한 33개의 이름이 새겨진  진사제명비가 있었다.
이곳에서 합격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의 거북 머리를 만지면서 나와 장명형수, 희정씨 그리고 방여사가 기념 촬영을 했다.

베트남 어는 응웬왕조(1802년)에 들어서면서 한자로 바꾸었다.
그 후 1882년 프랑스 식민주의 군대가 하노이를 점령하여 베트남을 식민지 로 만들면서
  베트남 지식인의 전통사상을 뿌리 뽑고 베트남을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당시 베트남 지배계급을 제외한 대부분의 베트남인이 문맹이었음을 이용하여 漢字는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특권계급이 백성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 유물이라고 매도하면서, 누구나 쉽게 깨칠 수 있는 백성의 문자를 써야 한다고 이간, 선동하여 漢字를 폐기하고 알파벳 전용을 시행하여 이를 성공시켰다.
漢字를 폐기하고  알파벳 전용 운동에 베트남 좌파가 협조했는데, 베트남 좌파의 협조가 프랑스 식민주의의 베트남 문자 알파벳 화 성공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현재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는, 17세기 프랑스 선교사 알렉산드 로드가 편찬한 『베트남/포르투갈/라틴어 사전』의 표기법을 기초로, 베트남이 프랑스 지배 하에 있던 1885년 「正書法(정서법)인 명칭 하에 강요되어 채택된 것이다.
문묘의 건물모양이 전통 베트남식 건물로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고 규문각은  타원형의 기와로 만든 지붕이 멋있고 벽이 없이 탁 트인 건물과 넓은 경내는 거리의 북적거림과는 거리가 먼 아주 조용한 곳이었으며  그 당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처럼 베트남의 이미지와 배치되는 느낌의 공간이었다.
규문각 지붕위의 용머리 장식은 용의 발가락이 3개이다. 중국황제만 발가락을 5개 만들고 속국은 발가락이 3개라고 한다. 우리 한국은 고종황제 때에 용의 발가락 5개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공자를 모신 사당 앞에는 유두화가 심겨져 있다. 유두화 꽃잎과 , 부자, 비상, 3개를 섞어서 만든 약이 사약이라고 한다.
규문각 안으로 들어서니 만세사표(萬世師表) 라는 글자와 함께 공자상이 있었고 14인이 좌우측에 도열해서 공자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었다.
공자 상을 모신 좌측에는 기념품가게 그리고  서점이 있었다.
다음 맨 안쪽으로 들어가니 대나무로 만든 베트남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7인조 악단이 있었다.
이 악단은 관광객을 위한 비공식적인 공연 단체이며 관광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공연한다고 한다.
6명중 1명만 남자이고 모두 여자이다. 의상 차림은 화려한 원색인 붉은색, 노란색 레이스로  단장하였고 베트남인 중에서 미인들만 모아 놓은 것 같다.
악기는 가야금 같은 악기이며 대나무로 만든 실로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두 각 악기 별로 악사들이 한곡씩을 연주 하였다. 신짜오~~~ 제10편(하노이-하롱베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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