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짜오~~~ 제11편(하롱베이)

조회 수 9590 추천 수 0 2006.02.15 10:05:29


신짜오~~~ 제11편(하롱베이)
# 제5일/ 11월 28일
조식을 호텔식으로 하고 호텔 로비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틈을 이용해  방여사가 개인 인물사진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였다.
입고 있는 의상의 색상이 좋지 않아  사이공에서 구입한 아오자이 의상을 다시 바꿔 입고 나오라고 하였다.  아내가 몇 컷을 호텔 로비에서 촬영하고 바깥의 정원수가 심겨진 곳에서는 내가 직접 카메라를 걸어 여러 컷을 촬영하였다.
방여사는 붉은 색 아오자이를 입고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촬영하였는데 포즈까지 지도하여 자연스러운 얼굴 표정을 포착하여 셔터를 눌렀다. 아마 몇 장의 인물 사진 중에서  몇 컷은 본인 마음에  들것이라 생각하며 촬영을 끝내고  하롱베이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관광 유람선들이 관광객 수보다 많아 보였다. 갈색으로 칠한 목선 선두에는 룡의 조각이 붙어 있었고 돛대는 옛날 엔진 없이 바람으로 다닐 때의 모습으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었다.
유람선이 출발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설픈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를  베트남 아주머니가 유람선 선체에 자기 배를 밧줄로 매어 놓고 1달러에 사라고 애원을 한다.
유람선은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빠른 속도에 매달린 작은 배가 전복될 것 같은 위험 상황이 다되어도 그 아주머니는 배를 풀지 않고 애원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낚싯대를 사주니 이내 그 베트남여인은 자기 배를 풀고 흔적 없이 살아져 버렸다.
그러자 잠시 후 또 과일을 파는 배가 유람선에 밧줄을 묶고는 과일을 사라고 야단이다. 이번에는 이회장님이 바나나 와 약간의 열대 과일을 사주었다.
이렇게 해상에서 유람선으로 장사를 하는 풍경은 베트남이나 중국 리강 등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풍광이다.
하롱베이로 들어가는 배들이 몇십 척은 되어 보였다. 한결 같이 같은 모양새로 배를 만들어 운항하니 하선하여 잘못하면 다른 배를 타고 올 법도 하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한 시간여 정도 항해를 하니  대한 항공에서 CF 촬영한 풍경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부부 끼리 CF 배경을 넣어 기념 촬영을 하였다. 모두 사진을 오랜만에 찍는지라 부부들이 서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여러 컷을 촬영하도록 해서 애를 먹었다.
그 다음은 즉석 이벤트로 “ 타이타닉” 클라이막스 부분을 연출해서 부부끼리 “하롱베이 타이타닉 ”을 촬영 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촬영을 하지 않으려하다가 이 회장 부부부터 먼저 촬영 테이프를 끊으니 나머지 부부 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촬영을 해서 뒷날 모임에서 인화된 사진을 보며 추억의 시간을 화제에 올렸다.
선상 하롱베이의 클라이막스 풍경이 지나니 수상 생선 시장에 나타났다. 잠시 이곳에 배를 정박시키고 배를 타고 오면서 화제에 올렸던 다금바리(능성어)회 맛을 보자고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한터라 다금바리를 사서 회를 해먹기로 했다.
박총무와 가이드가 곧 흥정에 들어갔고 1KG 에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하는 다금바리를 20키로 정도 구입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회를 해 먹을 줄 모른다. 그래서 회 뜨는 법도모르고 할 사람도 없어서 평소에 낚시를 잘 다니는 박소장이 주방장을 맡았다.
다금바리의 회 맛은 이 회를 먹어 본 사람은 안다.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그 향이 담백해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총 18명이 먹기에 적당한 양이었다.
다금바리 회와 매운탕을 박소장이 주방장의 솜씨를 발휘해서 선상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 하롱베이 천궁 동굴에 도착하였다.
이 섬은 과거에는 바다였는데 융기되어 섬이 형성되었고 석회질과 바다의 염분이 합쳐져서 탄소 성분이 녹아내려 동굴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33년 전 한어부가 이곳 섬을 오르다가 섬 중턱에 뚫려있는 하늘 문에서 동굴 안으로 추락하여 사망한 뒤 이동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동굴 천정으로 뚫린 “하늘 문”으로 통풍이 잘되어 동굴 안이 말라 습기가 없어서 종유석이 100년에 0.5cm 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동굴 내부를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는데 상세한 것을 기술할 수가 없다. 엄마 코끼리, 아기 코끼리 형상, 호랑이 입 벌리고 있는 형상, 선녀와 나무꾼 형상, 숨어있는 나무꾼 그림자, 등이 있었고 인공 분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하롱베이를 찾은 사람들이 거의가 한국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에티켓이 많은 문제점으로 노출되었다. 호텔로비에서 떠드는 사례, 식사 에티켓(뷔폐 후 잔반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외국 관광지에서 자국민(한국인)들인데 서로를 빨리 가자고 상소리를 하는 모습 등이 듣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각 여행사에서 외국 가는 관광객들에게 기본 에티켓 교육을 실시하였으면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곳의 바다 밑 심해의 지형은  육지의 산 지형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래서 떠다니는 고기가 없어 갈매기가 서식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지로 바다에는 갈매기가  한 마리도 보이지를 않았다.
단지 바다 밑에 집짓고 사는 돔 종류와 능성어(다금바리) 밖에 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꽃게 종류 집게발이 큰 게 종류 , 소라 고동처럼 생긴 고동 종류만이 수상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으나 다금바리회와  삶아서 먹는 집게발 게 외에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다음은 배를 타고 이동해서 “띠톱” 정자에 올라갔다. 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다. 총 계단 수는 427개이며 의미는 없다.
아마 이곳이 하롱베이의 전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하이라이트 일 것이다. 이곳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신 송월주 스님을 만났다. 송월주 스님을 나는 잘 몰랐으나 방여사가 너무 좋아하고 기념촬영을 원해서 몇 컷을 촬영해주었다.
날씨는 흐려서 사진 촬영은 너무 부적합하였다. 그래도 힘들게 가지고간 사진기가 미련이 남아 펜탁스 645로 몇 컷을 촬영하였다.
돌아오는 길의 선상에서는 선상 기념품 가게가 열렸다. 자수를 넣은 식탁보가 10달러, 진주 목걸이가 3~ 7달러 정도 가격으로 각종 액세서리를 판매 했다.
점심 식사 서빙을 한 아가씨가 직접 가게사장이다. 이곳에서 일행 중 어느 부인이 식탁보와 액세서리를 구입했다.
  하롱베이 선착장에서 하노이로 차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제 보다는 차가 좀 빠르게 속도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가이드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수교를 할 당시에는  전쟁박물관 ((당시 미전략국 건물 (O S S ,  C  I A ))에 우리나라가 베트남 적성 국가로 표시되어 되어 있었는데 한국이 베트남과 수교 당시에 적성국가 국기와  부대마크를 제거 요청해서 이제는 없어 졌다고 한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 사람이 가정 일구어 낳은 자식이 “라이 따이한” 이다. 요즘은 이 라이 따이한들이 한국인 아버지에게 친자 확인 소송을 많이 한다고 한다. 소송비용이 많이 소요 되므로 베트남 정부에서 이 비용을 지원해 주는데 주로 그 당시 한국 상사 주재원이 많았다고 한다.
  그 소송의 결론은 친자 확인 소송을 통해서 한국 내에 다시 가정을 일구어 잘 살고 있는 부유한 아버지에게 의탁하려는 마음이 커서였을 것이다. 라고 추측 해 본다.
  베트남 전에 활동했던 한국인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얻었고 경제적인 부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 전이 일어나기 전 어느 무역 회사원이 베트남 주재 해외근무 발령이 났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 설레임으로  베트남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회사 근무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관광도하고 새로운 세계의 환경에 적응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차츰 이곳의 생활이 몸에 익어지자 외로움과 반복되는 생활의 무료감 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청초한 물망초 같이 아리따운 베트남여인을 알게 되어  사랑이 싹터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회사에 요청하여 연장 근무까지 하게 되어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국 회사에서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베트남 부인은 한편으로는 남편을 의심하기도 했으나 자식까지 낳고 사는 마당에 다녀오라고 허락을 하였다.
회사원은 귀국을 한 후에 회사 일도 보고 일가친척들을 둘러보기도 하였는데 그 동안에 월남전이 발발 하였다.
전쟁이 발발 하였으니 베트남 가족들에게 연락도 할 수 없었고 연락이 아예 되지 않았다. 미군이 하노이에 폭탄을 8만 TON을 투하하였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전쟁이 빨리 끝나겠지 하고 자위하고 있었는데 64년 한국군 파병 후 전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이제는 베트남 가족의 생사도 확인이 되지 않고 오랜 전쟁 기간으로 나이만 먹고 있을 수 없어 베트남 가족을 가슴에 묻고 한국 여인과 결혼을 하여 아들딸 낳고 가정을 일구었다.
회사에도 열심히 다녀 자식을 모두 출가 시키고 자기도 어엿한 회사의 사장이  되어 뒤를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기자 베트남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직 생사도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의 부인에게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 하자 한국 부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노발대발하며 부인과 3개월을 냉전 상태에 있던 중 베트남 가족의 생사가 확인이 되었다고 한다.
사장은 베트남으로 출국하려하였으나 한국 부인이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죽어도 한이 맺혀 베트남 가족을 보기만하고 오겠다고 하자 한국부인이 남편을 혼자 보내지 않고 동행하겠다고 하여 부인과 함께 베트남에 귀환하게 되었다.
남편은 다음날 부인이 자리를 비켜준 상태에서 호텔 로비에서 두리번거리며 베트남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젊은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 아들과 재회를 하였다.
그 아들은 사장과 얼굴이 너무 닮아 있어 얼굴만 보아도 자식인지 알아보았다고 한다.
아들과 재회 하여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그 동안의 가정환경을 아들 입을 통해 들어 보니 사장은 기가 막혔다.
월남전이 시작되자 베트남 가족은 적성 국가 의 사람과 내통했다고 엄청난 고통과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남편과 헤어진 후 아내는 남편이 남기고간 재산을 팔아서 생활을 겨우 연명하고 있다가 그마저 없어지자 거지 같이 살아오면서 소식 끊긴 남편을 기다리며 결혼도 하지 않고 현재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들은 장성하여 결혼도하였고 자식까지 낳아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현재 아들은 베트남에서 최저 노동인 씨클로(인력거)를 끌면서 생활을 해가고 있다고 하여 아버지는 가슴이 아파 목이 메었다고 한다.
베트남 부인은 한국에서 부인이 함께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남편을 만나러 나오지 않았다 고 한다.
사장은 베트남 가족을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했는데  집을 사주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물론 돈도 주고 경제적으로 뒤 받힘이 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이드의 말이 베트남 부인과 결혼해서 아들도 낳아 키운 상태에서 소식이 끊긴 상황이었는데 한국 부인에게 굳이 과거를 꼭 알릴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반문했는데 그에 대한 답이 일행들에게서 구구 절절한 내용으로 나왔다.
당시 베트남에서 라이 따이한을 만든 사람들은 베트남 자식들이 한국 아버지를 찾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이사를 자주가고 전화번호도 바꾸고 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 주로 베트남 남부 지방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이런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한국에서 가정을 일구고 행복하게 사는데 그 행복을 베트남 가족 때문에 서로 고통을 당할 필요가 있느냐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그 마음의 고통은 당사자들만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넓고 광활한 베트남의 들녘 은 우리의 농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다만 이곳의 땅은 토심이 깊어 다리가 짧은 황소로는 쟁기질을 못하고 다리가 길고 힘센 물소로 논갈이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해남도는 과거 베트남 땅이었는데 현재는 중국 땅이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당시에 중국 국민당은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와 손잡았다. 이때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중국과 베트남이 전쟁을 시작하였다.
베트남이 중국과 전쟁을 종결 시키면서 해남도를 빼앗겼다.
월남(베트남)은 월족으로서 중국의 지배를 받아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월나라가 초나라에게 전쟁으로 망하자 월나라의 월족이 남하해서 월남(베트남)이 됐다는 설도 있다.
베트남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마약을 5KG을 소지하거나 거래하면 사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 유공 훈장이 있으면 사형은 면한다고 한다. 아직까지 베트남에서는 현대판 인민재판이 있다고 하며 국영 TV에서 총살형을  방영 한다고 한다.
공산국가라서 가능한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중국도 역시 베트남과 비슷한 제도로 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와는 좀 거리가 먼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에 일어나는 강력 살인사건을 보면 인면수심의 살인범들은 영원히 사회와 격리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땅을 내어 달라고 하면 국가유공 훈장을 보여 주면서 땅을 안내어 준다. 그래서 권력층에서 힘을 발휘하지 않으면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 신짜오~~~ 제12편(마지막 편)에 계속  
* 거제포토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3-0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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