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미마쎙~ 제 3편

조회 수 13888 추천 수 0 2006.02.15 10: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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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미마쎙~ 제 3편 (감사합니다)
2005년 1월 9일

오늘은 2박3일 일정의 마지막 날로서 조식 후 후쿠오카로 이동한다. 학문의 신을 모시는 태재부 천망궁을 관광하고 베이사이드 플레이스, 하카다 타워, 하카다 국제여객 터미널로 이동 귀국할 예정이다.
태재부 관광 전에 면세품 점에 쇼핑을 한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오늘은 당초 계획한 핸디캄을 하나 사야한다고 아내가 말한다.
made in japan 이라고 적힌 것만 일본 자국에서 생산한 제품이고 그냥 japan 이라고만 쓴 것은 oem 방식으로 들여온 제품이며 손톱 깎기 , 항균처리 칼, 지워지는 볼펜, 해초 팩, 핸드폰 고리, 일본카레 등이 선물용으로 좋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소니 핸디캄의 가격을 보니 국내가격보다 약 20만원정도가 싸다. 가격차는 조금 있다. 아내의 의견대로 항균처리 칼 2개와 핸디캄 , 선물용 일본카레를 몇 개사고 쇼핑을 마쳤다.
불교의 절이 말사가 있듯이 태재부 천망궁은  지방분사처럼 전국 천망궁의 분사이다. 신사는 일반 종교화되었기 때문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일본에서 신사는 당초에 없었으나 불교가 불전이 있는 불사가 있는데  일본인 우리도 신을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자. 는 취지에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 천망궁은 학문의신을 우대하는 신까지 올랐다.
스기하라가 후지하라에게 누명을 쓰고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후쿠오카 이곳까지는 너무 멀어 다시  회생해 갈수 없는  회생불가지역으로서  901년 태재부시 에 와서 2년밖에 살지 못하고 죽었다.
스기하라가 유배 올 때 매화나무를 두고 온 것을 마음아파 했다. 이곳의 매화나무는 스기하라가 매화나무를 뜰에 심어 봄에 꽃이 피면 매화꽃을 보고 시를 쓰고  시낭송을 하였다고 하는데 스기하라가 문학인으로서 하이칼라였다고 한다.
스기하라의 시“비매전설(飛梅傳說)”은 현재 일본 초등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비매전설(飛梅傳說)”은 귀양 간 주인을 따라 천리를 날아 왔다는 일본의 스기하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천신으로 받드는 신도(神道)의 산물인 천망궁(天滿宮)의 상징이라고 한다.
일본 전국에서 매화나무를 “비매전설”의 상징인 천망궁에 헌수했다. 초봄에 이곳에 매화나무에 핀 매화꽃을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고교입시철, 새해(하쯔모철)가 되면 스기하라 학문의 신을 모신 곳과 신사건물이 있는 곳 유명신사 3곳을 참배한다고 한다. 한해 7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와니”(왕인)박사가 일본에 많이 알려져 오사카 히라카타에 왕인박사 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왕인박사의 무덤 참배 시에  “슬리퍼를 신고오지 말라 그리고  애완견을 데리고 오지 말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고 한다. 아마 왕인박사의 무덤을 신성시하기위해 한 조처일 것으로 생각된다.
신사 주위에 떡을 많이 판다.
신사에 참배 시 쌀을 조금씩 가지고가서 헌납하는데 신사에서는 그 쌀로 떡을 해서 방문객에게 나누어준다.  “오메가야모찌”는 매화나무 꽃잎을 넣어 만든 떡 이다.
태재부를 구경하고  대기된 곳으로 아내와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일본 떡을 사서 먹어 보았다. 떡이 매우 부드럽고 달며 가운데에는 팥고물(양경)이 들어있어 맛이 한국 떡과는 섬세한 것이 일본 국민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 같다. 늘어선 상점에는 옷가게 잡화점 등 여러 종류의 일상 생활용품 가게가 들어서 있었는데 물건도 조잡하고 살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야시장 정도의 상품 정도 되어 보였다.
2002년 월드컵 개최 이후에는 b/s 채널에서 한국어 방송 강좌를 10분에서 15분 정도 방송한다고 한다.
종전 국영방송에서는 한국어 방송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월드컵과 환류 열풍 때문 이라고  한다. 월드컵 때문에 젊은이들이 한국의 문화를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太宰府 가 있던 터를 지나 내려오니 집들이 낮고 단아하고 작게 지어져 있었고 지붕은 기와이며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후리타 족”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자유(free) 아르바이트라고 한다. 낮에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술집에서 일한다. 낮에는 오피스 밤에는 술집에서 일하는 프리타족이 360만 명이나 있다고 한다. 이들은 사회 기본 틀(구조)을 흔든다. 기성세대 는 이들의 생활을 부정적으로 보나 고용 창출 면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이 프리타 족
이 들 중에서는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의존하면서 붙어사는 기생충족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주역인 미우라 공사와 동행하며 도움을 준 사무라이도  후쿠오카 출신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사무라이들 중 주범 이노우에가 입안하고, 무식한 무장 미우라고로는 행동대장 이자 시해 사건의 종범이며,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사무라이들을 모으고 동원한 총괄 모집책이었다.
이들 사무라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이며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시해 사건 성공 이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는 구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사의 사장이다.
한성신보사는 창립기금에서부터 모든 운영비를 일본공사관에서 지원했던 일본국가 소유 신문사이다. 한반도에 기자로 위장한 자들을 들여와서 조선정세에 대한 염탐과 정보 수집을 한 기관이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사무라이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한성 신보사의 기자들은 대부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로 가담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성공으로 후일 체신상과 내상(지금의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행동대원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二)는 도쿄 대 법학 부를 졸업하고 사건 후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하였다.
시바 시로우 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작전 참모로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칭 엘리트다. 시바 시로우는 그 후 일본에서 정치 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며 중의원 의원을 수차례 당선되었다.
그 외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토우카츠아키(藤勝顯), 하기와라(외무성경찰), 구미모도(한성신보 주필. 한학자), 시부다니(통역관), 야마타(신문기자), 니니와(의약품판매상), 사사키(의사), 기구치(신문기자), 무라이(육군대위), 사토(농민), 마쓰무라(교사), 고바야가와 등 총 48명이 참여했으며 시해사건 후 이들은 일본에서 대부분 정치 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는다.
  민비 시해사건 주역담당 미우라는 조선에서 후쿠오카로 돌아와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무혐의 로 풀려나 살다가 죽었다.
시해 주역인 그는 민 비의 마지막 눈초리를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소니 신원에 명성왕후시해 때 사용된 칼을 보관요청 하였는데 소니 신원에서는 이를 거부했으며 이런 칼은 다시는 만들지 말자고 하였으며  신사에 명성왕후  축원 관음상 만들어 축원 드렸으나 그 관음상이 태평양전쟁 때 없어졌다고 한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 교토 도지사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귀국하다가 후쿠오카에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 하다 의문사 하였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그룹이 있다. 형무소 벽에 윤동주 시인 사진을 걸고 추도한다고 한다.
일본에서 성공한 사람 MK 택시 유봉수 사장이다. 오사카에까지 진출하여 택시와 버스 연계하여 사업을 확장하여  성공하였다고 한다.
후쿠오카는  인심이 좋고 기후가 좋아 살기 좋은 곳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교토 는 인심 좋지 않아 인기가 별로라고 한다.
“현해탄”은  검고 거친 바다라는 뜻이다.  관비유학생 윤심덕씨의 “사의 찬미”는  대중음악, 대중음반, 대중가수로 신 음악 장르이며 윤심덕은 소프라노 가수이다.
김우진은 와세다 대학에서 작가로 활동 중 윤심덕을  좋아하게 된다.  김우진은 유부남으로서 윤심덕과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을  현해탄에 투신하여 죽음으로서 사랑을 끝냈다.
윤심덕 死의 찬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투신 후 유류품 수거 등 확인을 했으나 시신은커녕 유류품 한점도 못 건졌다. 그러나 이후 추측 설에는 두 사람이 위장 투신하고  선원을 매수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유럽으로 도피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도 추측하는 설도 있다.  

우리 일행은 이동하여 하까다 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항구는 조용하여 별로 움직임이 없어보였다.
전망대 창에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곳에 하얀색으로 칠한  CANELLIA LINE 연락선이 보인다.
저배는  밤에 하까다 항을  출발하여  새벽쯤에 부산에 도착 한다고 한다. 속도는 느려도 선체가 커서 많은 승객과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선박이다.
우리를 부산으로 실어갈 쾌속선 KOBEE - V 는 2시30분에 후쿠오카를  출발하여  5시 55분 부산 국제 여객 터미널 도착 하였다.
“인생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여행이란 시원한 옹달샘에서 짐을 풀고 잠시 쉬어가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생각나는 이번 여행에서 모처럼 동기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먼 훗날 추억으로 자리매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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